- 이란발 지정학적 리스크 완화 기대감에 국제 유가(WTI)가 하루 만에 10% 이상 폭락하며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유로화와 파운드화, 엔화 가치를 일제히 끌어올렸다.
- 다만 이란 측이 미국의 협상 제안 및 대화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시장 조작을 위한 가짜뉴스'라고 반박하고 있어 외환시장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높은 상태다.
뉴욕 외환시장에서 안전자산으로 군림하던 미국 달러화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중동발 전운이 감돌며 치솟던 달러 가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의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공격 시한을 연장하고 대화 가능성을 시사하자 급격한 하방 압력을 받았다. 특히 에너지 가격 폭등으로 고전하던 주요국 통화들이 일제히 반등하며 달러 인덱스는 장중 98선까지 위협받는 극적인 변동성을 연출했다.
트럼프의 '5일 유예' 선언, 달러 인덱스 99선으로 끌어내려
연합인포맥스(화면번호 6411)에 따르면 23일 오후 4시(미 동부시각) 기준, 뉴욕 외환시장에서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지수화한 달러인덱스(DXY)는 전장 대비 0.457포인트(0.459%) 하락한 99.125를 기록했다. 런던 거래 시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란을 향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전소 파괴' 최후통첩 영향으로 100선 안팎에서 강세를 유지하던 달러는 뉴욕장 개장을 앞두고 터져 나온 트럼프 대통령의 SNS 게시물에 방향을 급선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1일 이란이 48시간 내에 호르무즈 해협을 개방하지 않을 경우 강력한 군사적 타격을 가하겠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시한 만료를 불과 12시간 앞두고 그는 "이란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었으며, 국방부에 모든 군사 공격을 5일 동안 연기하라고 지시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깜짝 연기' 소식은 즉각적으로 달러 매도세를 유도했으며, 달러인덱스는 장중 98.878까지 떨어지며 급격한 되돌림 현상을 보였다.
국제 유가 10% 폭락…에너지 의존 통화 '안도 랠리'
달러 약세의 가장 강력한 촉매제는 국제 유가의 폭락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이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5월 인도분은 전장 대비 10.28% 급락한 배럴당 88.13달러에 마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란과 합의가 성사된다면 유가는 돌처럼 떨어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시장의 기대를 자극했다. 유가 급락은 에너지 수입 비중이 높은 국가들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며 해당 국 통화의 가치를 밀어 올렸다.
대표적으로 유로-달러 환율은 전장보다 0.477% 상승한 1.16134달러를 기록했다. 에너지 대란 우려가 완화되면서 유럽 천연가스 벤치마크인 네덜란드 TTF 선물 가격도 5.4% 하락해 유로화 강세를 뒷받침했다. 파운드-달러 환율 역시 1.34314달러로 0.732% 급등하며 눈에 띄는 오름세를 보였다. 영국의 키어 스타머 총리와 앤드루 베일리 잉글랜드 은행(BOE) 총재 등 수뇌부가 전쟁의 경제적 영향을 점검하는 가운데 터져 나온 긴장 완화 소식은 파운드화에 강력한 매수세를 불러일으켰다.
엔화 및 위안화 강세…엔-달러 158.422엔으로 하락
일본 엔화 역시 달러 대비 강세를 보였다. 달러-엔 환율은 전 거래일 뉴욕장 마감가인 159.304엔보다 0.882엔(0.554%) 하락한 158.422엔에 거래를 마쳤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정점을 찍고 내려오면서 달러의 상대적 매력도가 낮아진 결과다. 역외 달러-위안(CNH) 환율 또한 전장 대비 0.317% 내린 6.8855위안을 기록하며 전반적인 달러 약세 흐름에 동참했다.
이러한 환율 움직임은 시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단순한 시간 끌기가 아닌 실질적인 협상 국면 진입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에너지 가격 하락이 인플레이션 압력을 낮추고, 결과적으로 미 연준(Fed)의 긴축 경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이란 측의 '가짜뉴스' 반박…불확실성 여전한 시장
하지만 시장 일각에서는 이번 달러 하락세가 지속될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고 있다. 이란 정부가 미국의 발표 내용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란 외무부는 중재국을 통한 메시지 수신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지난 24시간 동안 미국과 어떤 형태의 협상이나 대화도 없었다"고 못 박았다.
심지어 협상 당사자로 거론된 모하마드 바게르 갈리바프 이란 의회 의장은 자신의 엑스(X)를 통해 "미국과 협상은 없었으며, 이러한 가짜뉴스는 금융 및 석유 시장을 조작해 미국과 이스라엘이 처한 수렁에서 탈출하기 위한 책략"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란 측의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트럼프 대통령의 '생산적 대화' 주장이 시장 안정화를 위한 일방적인 정치적 수사일 가능성을 시사하며, 언제든 지정학적 위기가 재발해 달러 강세가 재현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전문가들 "호르무즈 해협 흐름 회복이 관건"
외환 전략가들은 현재의 달러 약세가 추세적 하락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긴장 완화 증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TD증권의 자야티 바라드와지 외환 전략 총괄은 "상황은 여전히 매우 유동적"이라며 "향후 몇 주 안에 전쟁의 출구가 확실히 마련된다면 달러에 대한 매도 압력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에드워드 존스의 브록 와이머 투자 전략가는 "트럼프의 발언 변화는 분명 고무적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긴장 완화 신호는 호르무즈 해협을 통한 원유 흐름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지 여부"라고 지적했다. 즉, 물리적인 물동량 회복이 확인되지 않는 한 달러의 하락 폭은 제한적일 수 있으며, 이란의 반박이 계속될 경우 달러는 다시 안전자산 프리미엄을 회복하며 100선 재탈환 시도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