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가 미국과 이란 사이의 외교적 해결 가능성과 예상치를 크게 웃돈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 증가세에 밀려 2% 이상의 급락세를 기록했다. 시장에서는 그간 유가를 지탱해 온 중동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협상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확산되는 분위기다. 비록 이란 측이 미국의 제안에 대해 즉각적인 수용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공급 불안 심리가 상당 부분 완화된 것으로 풀이된다.
미·이란 종전 협상 급물살, 파키스탄 통한 15개 요구안 전달
25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5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 거래일보다 2.03달러(2.20%) 하락한 배럴당 90.32달러에 마감했다. 이날 시장의 이목은 워싱턴과 테헤란 사이에서 오가는 외교적 메시지에 집중됐다. 외신 및 관련 업계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최근 파키스탄을 중재자로 활용해 이란 측에 구체적인 종전안을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이 제시한 종전안의 핵심은 이란의 핵 포기와 세계 에너지 공급의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의 전면 개방을 포함한 총 15개의 요구 조항이다. 특히 미국은 이러한 요구사항들을 심도 있게 논의하기 위해 향후 1개월간 일시적으로 휴전하는 방안을 제안하며 협상 의지를 드러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역시 전날 발언을 통해 "우리는 현재 적절한 인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그들은 합의를 매우 절실히 원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낙관적인 전망을 뒷받침했다.
이란의 5대 역제안과 협상의 불확실성
이란 정부는 미국의 제안을 수령한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현재 제시된 조건들에 대해서는 날 선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란의 고위 정치·안보 당국자는 국영 프레스TV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도하다고 지적하며, "이는 전장에서 미국이 겪고 있는 실패라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처사"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이란은 종전의 전제 조건으로 5가지 핵심 요구안을 역제안했다. 여기에는 이란에 대한 침략 중단, 전쟁 재발 방지 보장, 전쟁 피해에 대한 배상, 모든 전선에서의 즉각적인 교전 중단, 그리고 호르무즈 해협에 대한 이란의 주권 행사 인정 등이 포함됐다. 이란 관영 파르스 통신 또한 협상 소식통을 인용해 이란이 현재 상태에서의 휴전 제안을 수용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보도하며 팽팽한 기 싸움을 예고했다.
전문가들은 양측의 공식적인 입장이 극명하게 갈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밑에서 실질적인 소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란의 거부 의사가 확인된 장 후반에 WTI 낙폭이 다소 축소되며 배럴당 90달러선을 방어하기는 했으나, 시장은 이미 지정학적 긴장 완화 가능성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美 상업용 원유 재고 690만 배럴 급증, 공급 과잉 우려 확산
지정학적 요인 외에 수급 데이터 역시 유가 하락을 부채질했다. 미 에너지정보청(EIA)이 발표한 주간 석유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일 기준 미국의 상업용 원유 재고는 전주 대비 무려 690만 배럴이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당초 시장 전문가들이 예상했던 50만 배럴 증가치를 무려 13배 이상 상회하는 기록적인 수치다.
이러한 재고 급증은 정유 시설의 가동 상황이나 수입량 변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결과로 보이나, 결과적으로 시장의 공급 과잉 우려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특히 이란과의 협상 소식으로 심리적 저지선이 약해진 상황에서 발표된 대규모 재고 증가는 투자자들의 매도세를 가속화하는 결정적인 트리거가 되었다.
전문가 제언 "공급 긴장 완화 흐름이나 즉각적 수급 개선은 미지수"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유가 하락이 단기적인 심리 변화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하면서도, 향후 협상 전개 양상에 따라 변동성이 확대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MST 마키의 사울 카보닉 에너지 리서치 책임자는 "전쟁이 종결될 가능성이 미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협상이 타결된다고 해서 실제 원유 수급 환경이 즉각적으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현재의 빡빡한 수급 상황이 당분간 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리스타드 에너지의 야니브 샤 애널리스트는 "이란의 공식적인 응답과 검토 과정이 남아있어 최종 합의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 있다"면서도 "중요한 점은 양측이 공급 차질이 장기화되기 전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으며, 비교적 부드러운 해결책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호르무즈 해협의 안정적 운영 여부와 미국의 재고 흐름이 향후 WTI 가격의 90달러선 안착 여부를 결정지을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