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인공지능(AI) 시대를 정면 돌파하기 위한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이끄는 xAI와 테슬라, 스페이스X의 기술력을 한데 모은 초대형 반도체 생산 거점 '테라팹(Terafab)' 건설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부족한 칩 공급 문제를 해결하려는 차원을 넘어, 에너지와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차세대 컴퓨팅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1TW에 달하는 유례없는 전력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이번 계획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국 반도체 산업에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킬 전망이다. 25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머스크의 행보가 불러올 단기적·장기적 영향력을 정밀 분석하며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지구 전력망 한계 넘는 '1TW' 구상…80% 우주로 향한다
머스크가 제시한 테라팹의 핵심 키워드는 '초월적 규모'와 '우주'다. 그가 목표로 삼은 1TW의 연산 능력은 현재 전 세계 AI 연산량(약 20GW)의 무려 50배를 상회하는 수치다.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기존 전력망 체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머스크는 이 대목에서 지상 전력망의 물리적 한계를 정면으로 지적하며, 막대한 컴퓨팅 파워의 80%를 지상이 아닌 우주 애플리케이션에 배정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러한 전략은 스페이스X의 저궤도 위성 통신망인 스타링크 체계와 결합된 '우주 기반 AI 데이터센터' 시대를 시사한다. 지상의 에너지 및 냉각 문제에서 자유로운 우주 공간을 AI 연산의 새로운 전초기지로 삼겠다는 뜻이다. 이는 반도체의 수요처가 지구라는 지리적 범위를 넘어 우주로 무한 확장됨을 의미하며, 향후 반도체 설계 및 제조 공정에서도 우주의 극한 환경을 견딜 수 있는 특수 사양이 표준화될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 들어설 테라팹은 제조 공정 측면에서도 기존의 틀을 파괴한다. 머스크는 로직과 메모리, 패키징은 물론 리소그래피(노광)와 마스크 수정 제작까지 전 과정을 한 장소에서 처리하는 '올인원(All-in-one)'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선언했다. 분업화된 기존의 글로벌 공급망 시스템을 수직 계열화하여 설계 반복 속도를 기존 대비 10배 이상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이는 공정 간 물류 시간을 단축하고 기밀 유지와 최적화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감사하지만 너무 느리다"…머스크의 도발과 K-반도체의 기회
머스크는 이번 발표 과정에서 현재의 파트너사인 삼성전자, TSMC, 마이크론 등을 향해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기존 파트너사들의 협력에 매우 감사하다"고 전제하면서도 "하지만 기존 공급망이 확장할 수 있는 최대 속도는 우리가 원하는 변화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다"고 단언했다. 이는 기존 반도체 거물들의 제조 속도에 만족하지 못하며, 결국 스스로 '속도의 경제'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국내 업계에서는 이 발언을 양면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우선 단기적으로는 '골드러시'에 비견되는 수요 폭발이 예상된다. 테라팹이 완공되어 안정적인 수율을 확보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서 xAI와 테슬라가 요구하는 막대한 물량은 여전히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최첨단 파운드리 공정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종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실장은 "머스크의 행보는 역설적으로 현재의 반도체 공급이 자신의 야망을 뒷받침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방증"이라며 "독자적인 팹 건설을 추진하더라도 원하는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하는 것은 단기간에 불가능한 영역인 만큼, 기존 기업과의 협력을 유지하면서 시장 파이를 키우는 촉매제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광남 미래에셋증권 연구원 역시 "TSMC나 삼성이 수십 년간 축적한 공정 노하우와 장비 운용 역량은 자본만으로 단숨에 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머스크의 프로젝트가 당초 일정보다 지연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기적 '게임체인저' 부상…탈(脫) 공급망의 위협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테라팹은 국내 반도체 산업에 강력한 위협 요인임이 분명하다. 머스크가 현재는 공급망 대체가 아니라고 선을 긋고 있으나, 결국 내재화가 본궤도에 오를 경우 핵심 고객사가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돌변하는 시나리오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번스타인(Bernstein)의 분석에 따르면, 1TW 규모의 연산 능력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매월 최대 1,800만 장의 웨이퍼가 필요하다. 테슬라가 이 중 극히 일부만 자급자족에 성공하더라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HBM 및 범용 메모리 시장 점유율에는 직접적인 타격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모건스탠리는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에 들어가는 칩 수요가 연간 2억 개를 넘어설 것으로 보고, 이를 테라팹에서 자급할 경우 기존 파운드리 시장의 생태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무엇보다 텍사스 테라팹이 미국 내에서 2나노(nm)급 첨단 생산 능력을 확보할 경우, 이는 단순한 기업의 선택을 넘어 지정학적 게임 체인저가 된다. 아시아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리스크를 해소하려는 미국 정부의 전략적 지지와 보조금이 집중될 경우, 삼성전자의 테일러 팹이나 TSMC의 애리조나 팹보다 더 강력한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텍사스 내 국내 소부장 기업 '낙수효과' 기대
위기 속에서도 실질적인 '낙수효과'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높다. 테슬라가 테라팹 건설을 위해 인프라와 공급망 관련 인력 채용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이미 텍사스 지역에 진출해 있거나 삼성전자의 해외 파운드리 투자에 동행했던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창이 열리고 있다.
테라팹이 지향하는 '올인원'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극자외선(EUV) 노광 공정부터 고난도 패키징까지 아우르는 정밀한 기술 생태계가 필수적이다. 특히 삼성전자의 테일러 팹 인근에 위치한 협력사들은 이미 현지 인프라와 대응 체계를 갖추고 있어, 테슬라의 새로운 공급망 체계에 편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류영호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해외 파운드리 투자 경험이 풍부하고 텍사스 현지 공급망을 갖춘 국내 업체들에 대한 테슬라의 관심도가 급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연상 충남대 반도체융합학과 교수는 "현재 미국 내에서 반도체 팹을 실제로 건설하고 운영할 수 있는 전문 인력과 노하우가 부족한 상황"이라며 "테슬라가 속도전을 펼치기 위해서는 결국 검증된 기술력을 가진 한국의 소부장 파트너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관건은 '압도적인 기술 격차'를 유지하는 속도다. 머스크가 지적한 기존 업계의 '느린 속도'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공정 효율화와 차세대 메모리 양산 속도 제고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 테슬라가 자체 팹을 구축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수율과 최첨단 공정에서 국내 기업들이 앞서 나간다면 테슬라는 '잠재적 경쟁자'인 동시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영원한 핵심 고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머스크의 테라팹 승부수가 한국 반도체 산업에 위기라는 자극제와 우주라는 새로운 영토를 동시에 선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