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이란 간의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이 고조되며 국제유가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소비자들의 향후 물가 상승에 대한 심리는 우려했던 것만큼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과거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당시와 비교해 상승 폭이 제한적인 수준으로, 정부의 적극적인 물가 관리 대책과 시장의 신뢰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특히 채권시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격적인 금리 인상 시나리오가 실제 실물 경제 지표와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향후 한국은행의 통화정책 행보에 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기대인플레이션 소폭 상승에 그쳐… 5년 장기 전망은 '요지부동'
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6년 3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를 보면, 향후 1년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인 기대인플레이션율은 2.7%를 기록했다. 이는 전월 대비 0.1%포인트(p) 상승한 수치로, 지난해 10월 이후 5개월 만에 반등한 것이지만 상승의 폭 자체는 크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향후 3년 인플레이션율은 2.6%로 전월 대비 0.1%p 올랐으며, 향후 5년 인플레이션율은 2.5%로 전월과 동일한 수준을 유지했다.
주목할 점은 모든 구간의 인플레이션 수치가 장기 평균치를 밑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향후 5년 인플레이션율의 경우 지난해 11월부터 5개월 연속 동일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인 유가 충격에도 불구하고 중장기적인 물가 안정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가 여전히 공고함을 시사한다. 한국은행은 2월 소비자물가가 전월 대비 2.0% 상승하는 등 완만한 오름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중동 사태로 인한 고유가 및 고환율 여파가 심리에 일부 반영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고 분석했다.
과거 우크라이나 사태와 대비되는 안정세… 정부 정책 주효했나
이번 조사 결과는 지난 2022년 3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당시와 비교했을 때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당시 향후 1년 기대인플레이션율이 한 달 만에 0.2%p 급등했던 것과 비교하면, 이번 중동 사태 이후의 상승 폭은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이러한 차이의 배경에는 정부의 선제적인 가격 통제 정책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중동 전쟁 직후 국제유가 변동성이 커지자 석유 최고가격제를 전격 시행하며 유류비 부담 완화에 나섰다.
또한, 2월부터 일부 식료품의 가격 인하를 추진하며 생활물가 안정을 도모한 점도 소비자 심리 방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한 채권시장 참여자는 "정부가 물가 관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 소비자들에게 전달됐다"며 "석유 최고가격제 등의 정책이 중동 전쟁이라는 대외 악재 속에서도 물가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정책적 노력은 일시적인 비용 상승 요인이 인플레이션 기대를 자극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채권시장 "4차례 금리 인상 선반영은 과도"… 안도감 확산
기대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안정적인 흐름을 보이면서, 서울 채권시장에서 형성된 과도한 금리 인상 기대감에도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그간 시장에서는 고유가 리스크를 반영해 향후 1년 내 최대 4차례의 기준금리 인상 가능성까지 가격에 반영해 왔다. 그러나 실제 소비자들의 물가 전망이 크게 흔들리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자, 이러한 시장의 프라이싱(Pricing)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채권시장 관계자들은 특히 장기 기대인플레이션의 '앵커링(Anchoring·안착)'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단기적인 물가 변동보다 장기적인 물가 기대를 중시하는 이유는 이것이 곧 통화정책의 신뢰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제롬 파월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역시 "일회적인 물가 상승이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악순환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장기 기대치를 안정시키는 것이 중앙은행의 핵심 의무"라고 강조해 온 바 있다. 국내 전문가들은 5년 기대인플레이션이 요지부동이라는 점을 근거로, 한국은행이 당장 급격한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 들 명분이 약해졌다고 보고 있다.
중동 전쟁 장기화 여부가 변수… 2차 파급 효과 주시해야
다만 낙관론만 펼치기에는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높다. 국제유가 상승은 전형적인 비용 측면의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 요인으로, 고유가 상황이 장기화될 경우 결국 기대인플레이션을 자극해 실제 소비자물가에 상방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정부의 가격 통제로 일정 부분 억제되고 있으나, 전쟁의 양상이 소강상태를 보이지 않고 장기 국면으로 접어든다면 기업들의 생산 비용 전가가 가속화될 위험이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과거 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도 전쟁 장기화 우려가 현실화되면서 기대인플레이션이 뒤늦게 급등하는 양상을 보였다"며 "중동 사태가 다음 달 조사 시점까지 이어지거나 확전될 경우, 소비자들이 이에 대응해 반응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향후 금리 인상 여부를 가늠하는 데 있어 5년 기대인플레이션의 향방이 결정적인 지표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중동 리스크가 실물 경제에 미치는 2차 파급 효과를 예의주시해야 한다는 제언이 잇따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