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가 미국과 이란 간의 전면전 위기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맞닥뜨리며 패닉 셀링에 빠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이란에 대해 '48시간 최후통첩'을 보내고 영토 점령 가능성까지 시사하는 등 극단적인 긴장 국면이 조성되면서 투자심리가 얼어붙은 결과다. 시장은 사실상 전쟁 발발 수준의 충격을 가격에 반영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향후 며칠간 증시가 전쟁 직후 기록했던 전저점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나타날 것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의 '48시간 최후통첩'과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감
23일 오전 국내 증시는 개장과 동시에 수직 낙하했다. 오전 9시 55분 현재 코스피 지수는 전 거래일 대비 356.48포인트(6.17%) 폭락한 5,424.72를 기록하고 있다. 장 초반 코스피200 선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프로그램 매도호가 효력을 일시 정지하는 '매도 사이드카'가 발동될 정도로 하락 압력이 거셌다. 코스닥 역시 5%에 육박하는 급락세를 보이며 1,100선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
이번 폭락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주말 사이 전해진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 발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에 대해 48시간 이내에 호르무즈 해협을 전면 개방하지 않을 경우, 이란 내 주요 전력 인프라 및 에너지 시설을 타격하고 카르그섬 등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겠다는 취지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이는 단순한 경제 제재를 넘어 실제 군사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극단적 시나리오'를 시장에 던진 셈이다.
김병연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호르무즈 해협 개방을 압박하며 인프라 타격을 경고하는 한편, 동시에 해상 이란산 원유 제재를 일시 완화하는 등 모순적인 스탠스를 보이고 있다"며 "이러한 행보는 실제 군사적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려 협상력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와 더불어 유가 관리라는 핵심 목적이 혼재되어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극단적 시나리오' 선반영하는 시장…추가 하락 압력 가중
금융시장은 본래 불확실성을 가장 기피하며, 특히 전쟁과 같은 지정학적 위기 시에는 최악의 상황을 먼저 가격에 반영하려는 특성을 보인다. 현재 시장 참여자들은 미군이 이란 영토 일부를 점령하고, 이에 맞서 이란이 중동 전역의 에너지 시설을 동시다발적으로 타격하여 글로벌 원유 공급망이 완전히 마비되는 시나리오를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공포는 외환시장에서도 즉각 나타났다. 원·달러 환율은 장중 1,510원선을 터치하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리스크 오프(위험자산 회피) 심리가 극에 달하면서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달러화로 자금이 쏠리는 양상이다. 김병연 연구원은 "시장이 불확실성을 선반영하며 하락의 골을 깊게 파고 있다"며 "과거 미-이란 분쟁이 격화됐을 당시 기록했던 지점인 5,059포인트나 5,096포인트 선까지 추가로 테스트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과거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볼 때, 자산 시장의 충격이 임계치를 넘어설 경우 정책적 태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 연구원은 "트럼프의 일관된 패턴은 '최대 압박 후 시장 반응 확인, 이후 우회적 완화 카드 제시'였다"며 "주가와 유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흔들릴 경우 결국 그의 스탠스가 바뀔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인플레이션 공포 재점화와 통화정책 불확실성
중동발 리스크는 단순히 지정학적 문제를 넘어 글로벌 거시경제 전반에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하고 있다. 전쟁 장기화 우려로 유가가 급등하면서 연방준비제도(Fed·연준)와 유럽중앙은행(ECB)의 통화정책 경로에도 비상이 걸렸다.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시장을 짓누르는 대목이다.
김성노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미 연준과 ECB가 물가 전망치를 상향 조정한 상태에서 지정학적 리스크가 유가를 밀어 올리면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은 더욱 거세질 것"이라며 "유로존의 경우 이미 물가 전망치를 0.7%포인트나 올린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물가가 통제 범위를 벗어날 경우 금리 인하 기대는 사라지고 오히려 금리 인상에 대한 논의가 다시 부각될 수 있다는 점이 시장에 추가적인 부담을 주고 있다"고 진단했다.
리스크 관리냐, 저점 매수냐…전문가들의 엇갈린 대응
시장의 변동성이 극에 달하자 투자 전략을 놓고 증권가의 시각도 팽팽하게 갈리고 있다. 우선은 보수적인 관점에서 현금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신중론'이 우세하다. 이상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국내 증시가 단기 반등 이후 리스크 프리미엄이 상당 부분 되돌려진 상태에서 타국 대비 높은 변동성을 노출하고 있다"며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일정 수준의 현금을 확보하고, 펀더멘털 대비 과하게 하락한 대형주 중심으로 선별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반면, 현재의 폭락을 과도한 공포에 기반한 단기 진통으로 보고 비중 확대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역발상 투자'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경민 대신증권 연구원은 "중동 이슈가 장기화될 여지는 있으나, 기업들의 실적 개선과 주주 친화 정책이라는 근본적인 모멘텀은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원은 "주요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과 주당순이익(EPS) 상향 조정 등 펀더멘털 동력이 살아있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돌발 악재로 인한 급락은 주식 비중을 늘릴 수 있는 전략적 구간"이라고 분석했다.
수급 측면에서는 외국인과 기관의 '탈출 러시'가 이어지고 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외국인은 약 9,700억원, 기관은 8,500억원 이상을 순매도하며 지수를 끌어내리고 있다. 특히 삼성전자(-5.02%)와 SK하이닉스(-6.16%) 등 반도체 대형주에 매도세가 집중되면서 지수 방어선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형국이다. 중동 긴장이 해소되거나 트럼프 대통령의 전향적인 입장 변화가 나오기 전까지 국내 증시의 변동성 장세는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