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적 리스크가 금융 시장을 덮칠 때 자산가들이 찾는 '안전 자산'의 공식이 바뀌고 있다. 최근 중동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이라는 거대 악재 속에서 비트코인이 전통적인 안전 자산인 금과 대표적 위험 자산인 주식 지수를 모두 앞지르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비트코인이 단순한 투기 수단을 넘어, 글로벌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을 방어하는 독자적인 자산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중동 분쟁 속 10% 급등…금·주식은 하락 반전
17일(현지시간) 글로벌 투자은행 번스타인의 보고서에 따르면, 비트코인은 최근 중동 분쟁이 격화된 시점부터 놀라운 가격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번스타인의 수석 애널리스트 가우탐 추건니는 "비트코인과 가상화폐 시장은 중동 분쟁이라는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도 금과 주식 지수를 능가하는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실제 수치로 보면 그 차이는 더욱 명확하다. 지난달 28일 미국과 이란의 충돌 가능성이 대두되며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이후, 비트코인 가격은 약 10%가량 상승했다. 반면 같은 기간 시장의 지표가 되는 S&P500 지수는 2% 하락했으며, 전통적 안전 자산의 대명사로 불리는 금조차 4% 가까이 떨어지는 약세를 보였다. 위기 상황에서 자금이 주식과 금을 빠져나와 오히려 비트코인으로 유입되는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기관 투자자의 귀환…ETF로 유입된 21억 달러의 의미
이러한 비트코인의 독주 배경에는 기관 투자자들의 견고한 지지세가 자리 잡고 있다. 번스타인은 지난 3주 동안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를 통해 약 21억 달러(한화 약 2조 8천억 원)의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었다고 설명했다.
주목할 점은 투자 주체의 성격이다. 과거 개인 투자자 중심의 시장이었을 때는 지정학적 위기 시 패닉 셀(Panic Sell)이 빈번했으나, 현재는 자산운용사, 연기금, 그리고 국부펀드를 포함한 기관 투자자들의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다. 가우탐 추건니 애널리스트는 "기관들의 포트폴리오 다각화 전략에 비트코인이 필수 자산으로 편입되면서, 외부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강력한 자본 기반이 구축되었다"고 분석했다.
마이크로스트래티지의 '무한 매수'와 소유 구조의 혁신
상장사들의 비트코인 매집 전략 또한 시장의 하방 경직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비트코인을 가장 많이 보유한 상장사인 마이크로스트래티지(MSTR)는 올해 들어서만 6만 6,231개의 비트코인을 추가로 사들였다.
마이크로스트래티지의 이러한 행보는 단순히 자산을 늘리는 것을 넘어 비트코인 시장 전체의 체질을 바꾸고 있다는 평가다. 추건니 애널리스트는 "마이크로스트래티지의 재무 모델과 비트코인 ETF의 결합이 비트코인의 소유 구조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며, "과거보다 훨씬 탄력적이고 안정적인 자본 기반을 가진 자산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기업 단위의 장기 보유 물량이 늘어날수록 시장의 변동성은 제어되고 신뢰도는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개인 공황 매도 압도한 '장기 보유자'의 저력
시장 내부적인 심리 지표도 흥미로운 양상을 보인다. 최근 몇 달간 가격 변동성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상당수 개인 보유자들이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공황 매도에 나섰으나, 시장의 대세에는 지장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1년 이상 비트코인을 보유한 이른바 '호들러(HODLer)'들은 지정학적 위기 속에서도 매도 버튼을 누르지 않고 회복력을 유지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스마트 머니'의 시장 지배력 강화로 풀이한다. 단기적인 뉴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인들의 물량을 기관과 장기 투자자들이 흡수하면서 비트코인의 가치 저장 수단으로서의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17일 기준 비트코인은 24시간 전보다 0.75% 소폭 하락한 7만 4,332달러선에서 거래되고 있으나, 이는 단기 차익 실현에 따른 미세 조정일 뿐 중장기적인 상승 추세는 여전하다는 것이 업계의 지배적인 시각이다.
결론: 새로운 금융 질서의 주인공이 된 비트코인
결론적으로 이번 중동 사태는 비트코인이 더 이상 주식 시장의 흐름을 단순히 추종하는 위험 자산이 아님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금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록하고, 주식보다 낮은 상관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비트코인은 글로벌 경제 위기 시 포트폴리오를 방어할 수 있는 '디지털 대체 자산'으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비즈니스맨들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기관 자금의 유입과 상장사의 매집, 그리고 ETF라는 제도적 장치가 결합하면서 비트코인은 이제 외면할 수 없는 메인스트림 자산이 되었다. 지정학적 리스크가 상수가 된 고물가 시대에 비트코인이 보여준 이번 '회복력'은 향후 글로벌 자본의 흐름이 어디로 향할지를 가늠케 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