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법원이 엘리엇의 국제투자분쟁(ISDS) 취소소송에서 한국 정부의 승소를 판결했으나, 판결문 말미에 엘리엇이 메이슨 사건과 같이 구제받을 권리가 충분함을 명시하여 손해배상 책임이 완전히 면제되기는 어려울 전망입니다. 법원은 국민연금공단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았지만, 대통령·청와대·복지부 개입은 국가기관 조치로 재확인하며 엘리엇의 손해와 인과관계 여부를 다시 판단하라고 명했습니다.
정부가 미국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의 국제투자분쟁(ISDS) 취소소송에서 승소했다고 발표하며 손해배상 책임에서 벗어난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지만, 실제 영국 법원의 판결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정부 발표와는 온도 차이가 감지됩니다. 법원이 국민연금공단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아 법리적으로는 정부가 승소했지만, 판결문 말미에 엘리엇이 앞서 배상금 지급이 확정된 메이슨 사건과 유사하게 여전히 피해 구제를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막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1년 전 분쟁, 8년째 이어진 지난한 ISDS
엘리엇과 한국 정부 간의 국제투자분쟁(ISDS)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엘리엇은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의 의결권 행사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며 2018년 7월 ISDS를 제기했습니다. 약 5년 간의 중재 절차 끝에, 2023년 6월 중재판정부는 엘리엇의 주장을 일부 인용하여 정부에게 배상원금과 지연이자를 포함한 약 1,600억 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습니다.
정부는 이 중재 판정에 불복하여 2023년 7월 영국 법원에 중재판정 취소를 요청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2024년 8월 1심에서 각하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즉시 항소했으며, 2025년 7월 항소법원에서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돌려보냈습니다. 지난 23일 영국 1심 법원에서 나온 판결은 바로 이 항소심의 환송 1심 결과입니다.
국민연금공단, 국가기관 판단 여부가 핵심 쟁점
이번 재판의 가장 중요한 쟁점은 '국민연금공단이 국가기관의 조치로 간주될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정부는 국민연금공단이 정부와 별개의 법인격을 가진 독립적인 기관임을 강조하며, 공단의 의결권 행사를 국가기관의 행위로 볼 수 없어 정부의 배상 책임을 물을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판결문 속 '엘리엇, 메이슨과 동일한 구제 권리' 문구의 의미
그러나 75쪽에 달하는 영국 법원의 판결문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정부가 이번 판결로 손해배상 책임을 완전히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법원이 국민연금공단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 외의 부분에서는 기존 중재판정부의 판단이나 엘리엇 측의 주장이 상당 부분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재판부는 대통령, 청와대, 보건복지부의 개입은 국가기관의 조치임을 재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국가기관의 조치가 엘리엇이 입은 손해와 인과관계가 성립하는지를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등 중재 절차에서 다시 판단하라고 명했습니다.
메이슨 사건과의 비교, 정부 책임 가능성 시사
특히 주목할 부분은 판결문 말미의 결론입니다. 재판부는 "메이슨 측 청구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중재판정부의 관할권을 인정한 '청와대 조치'에 근거해서도 엘리엇이 동일한 구제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 (it may well be entitled to the same relief on the basis of its case concerning the Blue House Measures, just as the Mason claimants were)"고 명시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메이슨'은 2015년 삼성물산에 투자했던 또 다른 미국계 헤지펀드입니다. 메이슨 역시 2018년 엘리엇과 동일한 이유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S를 제기했으며, 수년간의 법정 공방 끝에 지난해 최종적으로 746억 원의 배상금을 수령했습니다. 이는 한국 정부가 ISDS 관련 소송에서 패소하여 지급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번 판결은 '청와대 → 보건복지부 → 국민연금공단 → 엘리엇 손해'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를 다시 따져보게 만들었으나, 국민연금공단을 국가기관으로 보지 않고도 정부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던 메이슨 사건과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법원의 견해를 명확히 보여준 것입니다. 또한, 과거 정부에 막대한 손해배상을 명했던 동일한 중재판정부가 다시 사건을 심리하게 된다는 점 역시 정부로서는 안심하기 어려운 요소로 작용할 전망입니다.
이번 영국 법원의 판결은 법리적으로는 정부의 승리로 해석될 여지가 있지만, 판결문 내용상 엘리엇이 추가적인 배상금을 지급받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는 점에서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특히 메이슨 사건과의 유사성을 명시한 부분은 향후 진행될 중재 절차에서 엘리엇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남은 절차에서도 국익을 최우선으로 대응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엘리엇 측이 주장하는 매일 1만 달러 이상의 이자 발생 등 추가적인 재정적 부담이 가중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법무부는 "남은 절차에서도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여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습니다. 하지만 이번 판결은 정부의 ISDS 대응 방식과 손해배상 책임 면피 전략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