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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경제신문

세종대왕자 태실과 한글의 빛, 그리고 선석사의 숲이 전하는 역사

박성민 기자 (12kerren@gmail.com)


세종대왕자 태실과 한글의 빛, 그리고 선석사의 숲이 전하는 역사

박성민 기자 (12kerren@gmail.com)




최초 작성일 : 2025-08-19 | 수정일 : 2025-08-19 | 조회수 : 20


세종대왕자 태실과 한글의 빛, 그리고 선석사의 숲이 전하는 역사

태실 앞에서 떠올린 세종대왕

경북 성주 인촌리에 위치한 세종대왕자 태실은 조선 왕실의 가장 성스러운 공간 중 하나다. 그러나 태실 앞에 서면 많은 이들이 먼저 떠올리는 인물은 태를 남긴 왕자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아버지, 세종대왕이다.
세종은 한글을 창제하여 "말은 있으나 글이 없어 뜻을 펴지 못하던" 백성들에게 목소리를 선물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단순한 문자 체계의 제정이 아니라, 억눌린 민중에게 사유와 표현의 자유를 열어준 위대한 사회 개혁이었다. 이는 시와 소설, 희곡과 수필로 이어지는 한국 문학의 토대를 마련했고, 백성의 일상과 감정이 글로 새겨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따라서 태실을 찾는 이들에게 세종대왕의 한글 정신은 곧바로 떠오르는 상징적 기억으로 자리한다.

 

세종의 아들 18명과 손자 단종의 태실

태실은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그 태를 씻어 태항아리에 담아 봉안한 곳이다. 조선 왕실은 태가 국운과 직결된다고 믿어, 왕실의 안정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례로 태실을 조성했다. 이 과정은 ‘장태(藏胎)’라 불리며, 고려 시대에도 시행되었지만 조선에 들어와 왕자·공주의 태까지 봉안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세종 20년(1438)부터 세종 24년(1442)에 걸쳐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세종의 아들 18명과 손자 단종의 태가 봉안되어 총 19기의 태실이 모여 있다. 대부분의 태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것과 달리, 성주 태실은 유례없는 규모로 집단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다.

역사학계는 이 태실을 통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의 의례 변화, 조선 초 태실의 초기 형태, 그리고 왕실이 국운을 어떻게 상징화했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고 본다.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성주 태실은 단순한 봉안지가 아니라 왕실 의례 제도의 전환기 연구에 핵심적인 실물 자료로 손꼽힌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켜낸 태실의 존엄

일제강점기 전국의 태실들은 심각한 훼손을 겪었다. 많은 태실이 강제로 이장되어 경기도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지만, 성주 태실은 예외적으로 원래 자리를 지켰다.
이는 단순한 행정적 결정이 아니라, 성주 지역의 지리적·정신적 상징성이 지켜낸 결과였다. 태실은 국가와 왕조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였기에, 이곳의 존속은 곧 조선 왕조의 기억을 끝까지 지켜낸 저항의 상징이기도 했다.

 

선석사와 500년의 숲

태실이 자리한 태봉 아래에는 신라 효소왕 11년(692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선석사가 있다. 본래 ‘신광사’로 불리던 절은 고려 공민왕 때 나옹왕사 혜근에 의해 ‘선석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오늘날에도 대웅전을 비롯한 조선 후기 다포양식 건축물이 남아 있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선석사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소나무·팽나무가 가로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단순한 자연이 아니라, 왕실 사신과 수행자, 마을 사람들의 삶을 지켜온 기록자였다.
500년 세월을 견뎌온 느티나무는 마을 사람들에게 신목으로 여겨져 쉼과 그늘을 제공했고, 소나무는 절개와 기개의 상징으로 서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벌목과 강제 이식의 위협 속에서도 살아남은 이 숲은, 오늘날 조용한 수호자이자 생명의 연대기로 평가받는다.

한 지역 문화해설사는 “이 숲길을 걸으면 단순히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숨결을 듣는 경험을 한다. 사람마다 저절로 발걸음을 낮추는 이유는 그 숲이 기억하는 것이 너무 깊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 선석사 대웅전의 모습.

 

 

애민의 문자와 생명의 숲이 만나는 곳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백성들의 가슴에 언어의 빛을 밝혔듯, 성주 태실과 선석사의 숲은 왕실과 백성, 권력과 자연이 교차하는 역사의 무대였다. 태실은 국운과 혈통을 보존하려는 왕실의 상징이었고, 숲은 수행자와 백성의 발걸음을 품은 민중의 기억이었다.
따라서 이 두 공간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공통적으로 “사람을 품는” 기능을 했다. 문자로 백성을 품은 세종의 애민 정신과, 숲으로 사람을 감싼 선석사의 자연은 결국 역사와 문화가 서로를 지탱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의 성주 태실

오늘날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단순히 옛 왕실의 유적지가 아니다.

학계에서는 조선 전기 태실의 원형을 보여주는 문화재적 가치로 주목한다.

지역 사회에서는 노거수 숲길이 주는 생태적·정신적 자산으로 의미를 확장한다.

더 나아가 한글날과 같은 기념일과 연계하여 세종의 정신을 기리는 교육 현장으로 활용될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성주 태실과 숲을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현재에도 숨 쉬는 공간”이라고 강조한다. 후손들이 이곳을 걸으며 세종의 애민 정신과 자연의 울림을 함께 느낀다면, 성주 태실은 미래 세대에게도 계속해서 빛을 발하는 살아 있는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Tags  #인물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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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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