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제 유가 급등이 단순한 물가 상승을 넘어 수요 파괴와 경기 침체를 유발할 수 있다는 '에너지 쇼크' 공포가 시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중앙은행이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에서 인플레이션보다 성장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하며 연말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은 절반 수준으로 낮아졌다.
글로벌 채권시장의 기류가 단 하루 만에 정반대로 뒤집혔다. 그동안 시장을 압박해온 고질적인 인플레이션 공포보다 경기 성장이 꺾일 수 있다는 실질적인 '침체 우려'가 투자 심리를 장악한 결과다. 특히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를 가시권에 두는 등 급등세를 지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채 금리가 하락하는 이례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고유가가 물가를 자극하는 단계를 넘어 경제 전반의 수요를 파괴하는 역풍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채권 금리 동반 하락... '인플레이션'에서 '성장'으로의 시선 전환
31일 연합인포맥스와 주요 외신에 따르면, 지난밤 미국 채권시장에서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전 거래일 대비 9.70bp 급락한 4.3420%를 기록하며 장을 마쳤다. 아시아 시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이어졌다. 이날 오전 기준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4.35% 수준에서 등락을 거듭하며 하락 기조를 유지했다.
이러한 금리 하락세는 미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유럽 채권시장의 벤치마크 역할을 하는 독일 국채(분트) 10년물 금리 역시 6bp 이상 떨어졌으며, 영국 국채 금리도 하향 곡선을 그렸다. 아시아권에서는 일본 국채가 초장기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만기물에서 금리가 낮아졌고, 호주 국채 금리 역시 2~3bp 수준의 낙폭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주요국 채권 금리가 일제히 하락한 결정적 원인으로 투자자들의 관심사가 '유가발 인플레이션'에서 '잠재적 성장 저해' 문제로 급격히 이동한 점을 꼽는다. 유가가 임계점을 넘어설 경우 소비 위축과 기업 이익 감소로 이어져 결국 심각한 경기 침체를 초래할 수 있다는 공포가 시장을 선점한 것이다.
이유 1: 고유가의 '역습', 인플레이션보다 무서운 경기 침체 확률 상향
첫 번째 이유는 고유가가 더 이상 단순한 물가 상승 요인이 아닌, 강력한 '수요 충격'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국제 유가는 최근 3% 넘게 급등하며 3거래일 연속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가 상승은 국채 금리 상승(가격 하락) 요인이지만, 현재 시장은 유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경제 성장에 치명적인 '부정적 수요 충격'을 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유가와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통화 정책 사이의 상관관계를 심도 있게 분석했다. BofA는 "유가가 배럴당 80~100달러 범위에 머무를 때는 인플레이션 위험이 실업률 위험보다 크기 때문에 연준의 금리 인상 명분이 확고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유가가 이른바 '골디락스'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부터는 인플레이션 위험은 오히려 감소하고 실업률 상승 위협이 커지는 국면으로 진입한다"고 경고했다.
즉, 유가 충격이 충분히 크다면 초기에는 물가 상승률을 끌어올리겠지만, 이후 급격한 수요 감소를 유발해 성장에 거대한 역풍을 일으킨다는 논리다. 이에 발맞춰 골드만삭스는 향후 12개월 내 경기 침체 가능성을 30%로 상향 조정하고, 미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소폭 하향했다. 페퍼스톤의 마이클 브라운 수석 전략가 역시 "에너지 가격 쇼크는 단기적인 물가 상승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성장에 상당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시장의 불안감을 대변했다.
이유 2: 중앙은행의 딜레마, "성장 위험 대응이 우선될 것"
두 번째 이유는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 기조가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그동안 채권시장은 중앙은행의 강력한 긴축 의지를 반영해 단기물 위주로 매도세를 이어왔으나, 경기 침체 징후가 뚜렷해지면서 이러한 긴축 우려가 과도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시장의 연말 금리 인상 기대치는 급락했다.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투자자들은 올해 연말 기준금리가 인상될 가능성을 약 25%로 점쳤으나, 현재 이 수치는 13%까지 축소된 상태다. 이는 인플레이션 억제만큼이나 경제 성장 방어가 시급해질 것이라는 시장의 판단을 반영한다.
야데니 리서치의 에드 야데니는 "단기 국채 금리는 그동안 긴축 대응을 반영해 가격이 형성됐으나, 실제 긴축이 단행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한 시장이 빠르게 되돌림 현상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특히 "스태그플레이션(경기 불황 속 물가 상승) 환경이 조성될 경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인플레이션 위험보다 경제 성장 위험에 대한 대응을 우선시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국 중앙은행이 금리를 더 올리기보다는 경기 부양이나 유지 쪽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 채권 매수세를 자극한 셈이다.
이유 3: 소비자의 한계 임박, 에너지 비용 전가 불가능성
마지막 이유는 인플레이션 충격이 소비자에게 온전히 전이될 수 없다는 한계론이다. 기업들이 에너지 비용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되면서 인플레이션 압력이 생각보다 강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영국 투자 플랫폼 웰스 클럽의 수잔나 스트리터 최고 투자 전략가는 "에너지 비용 상승이 소비자 가격에 반영될 수 있을지에 대해 여론이 갈리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소비자들이 이에 강력히 반발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라고 전했다. 즉, 소비자들이 지갑을 닫음으로써 기업의 가격 인상을 저지하고, 이것이 결과적으로 물가 상승 속도를 늦추는 대신 경기 둔화를 가속화할 것이라는 뜻이다.
미국자동차협회(AAA)의 과거 설문 데이터는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한다. 2022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의 60%는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4달러에 도달할 경우 운전 습관이나 생활 방식을 바꿀 것이라고 답했다. 현재 미국 전역 평균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4달러 바로 아래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소비 임계점에 바짝 다가서 있는 상태다. 이는 고유가가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는 '티핑 포인트'에 도달했음을 시사하며, 채권 투자자들이 인플레이션보다 수요 파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근거가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현재 채권시장은 고유가라는 동일한 재료를 두고 '물가'가 아닌 '성장'의 관점에서 재해석을 시작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의 시장 진정 시도가 효과를 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은 이제 말뿐인 구두 개입이 아닌 경기 안정을 위한 실질적인 지표와 구체적인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당분간 글로벌 채권시장은 경제 지표의 미세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성장 쇼크'에 대비한 변동성 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