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엔비디아(NAS:NVDA)를 향해 시장의 전설적인 비관론자이자 영화 '빅쇼트'의 실제 모델인 마이클 버리가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던졌다. 엔비디아가 현재 취하고 있는 대규모 물량 확보 전략이 과거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 붕괴 직전의 시스코 시스템즈(NAS:CSCO)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는 분석이다. 버리는 엔비디아가 미래 수요를 지나치게 낙관하며 체결한 천문학적 규모의 구매 약정이 향후 시장 변화에 따라 기업의 목을 죄는 부메랑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폭증한 '구매 약정' 952억 달러, 전략적 선택인가 위험한 도박인가
현지시간 26일, 마이클 버리는 자신의 서브스택 뉴스레터를 통해 엔비디아의 재무 지표 중 하나인 '구매 약정(Purchase Obligations)'의 급격한 팽창에 주목했다. 엔비디아의 최근 공시에 따르면, 이들이 주요 반도체 파운드리 및 공급업체와 체결한 구매 약정 규모는 무려 952억 달러(한화 약 133조 원)에 달한다. 이는 불과 1년 전 기록했던 162억 달러와 비교했을 때 무려 6배 가까이 급증한 수치다.
구매 약정이란 기업이 미래의 특정 시점에 특정 가격으로 원자재나 제품을 인수하기로 확약하는 계약을 의미한다. 엔비디아의 경우,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AI 칩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TSMC 등 주요 생산 파트너들의 생산 라인을 선점하고 필요한 부품을 미리 확보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콜레트 크레스 엔비디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최근 실적 발표 자리에서 "우리는 통상적인 수준보다 훨씬 더 장기적인 시계를 가지고 향후 여러 분기를 넘어설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재고와 생산능력을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공급 부족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인 '공격적 경영'임을 강조한 것이다.
버리의 진단, "외부 충격 아닌 내부적 결정이 초래할 리스크"
하지만 마이클 버리의 시각은 냉혹하다. 그는 엔비디아 경영진의 이러한 행보를 '평시의 경영(Business as usual)'이 아닌 명백한 '리스크(Risk)'로 규정했다. 버리는 "현재 엔비디아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며, 수출 충격이나 외부 요인에 의한 변화도 아니다"라며 "이는 사업 계획 내부에서 비롯된 철저히 의도적인 결정의 결과"라고 진단했다. 즉, 시장 상황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엔비디아 스스로가 공급망 생산능력을 과도하게 선점함으로써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버리는 특히 엔비디아가 수요의 강도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전에 대규모 물량을 미리 확약하는 점을 우려했다. 만약 AI 열풍이 예상보다 빠르게 식거나, 빅테크 기업들의 자본 지출(CAPEX)이 정점을 찍고 하락세로 돌아설 경우, 엔비디아가 확약한 952억 달러 규모의 구매 약정은 고스란히 '과잉 재고'라는 거대한 짐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논리다.
시스코의 악몽, 25억 달러 상각과 주가 90% 폭락의 기시감
마이클 버리가 엔비디아의 비교 대상으로 제시한 기업은 2000년대 인터넷 혁명의 주역이었던 시스코 시스템즈다. 2000년 3월 당시 시스코는 인터넷 인프라 수요가 영원히 급증할 것이라는 낙관론 속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제치고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에 등극했었다. 당시 시스코 역시 현재의 엔비디아처럼 연간 50%에 달하는 고성장 기대치에 맞추기 위해 공급업체들과 대규모 구매 약정을 체결하며 생산능력을 경쟁적으로 확보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기대했던 인프라 수요가 실제 구매로 이어지지 못하면서 시스코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재고를 떠안게 되었고, 결국 2001년 한 해에만 25억 달러 규모의 재고를 자산에서 상각 처리해야 했다. 이는 곧 실적 악화와 신뢰도 추락으로 이어졌다. 시스코의 주가는 2000년 3월 31일 82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8.12달러까지 추락하며 고점 대비 90%가 넘는 기록적인 폭락을 경험했다. 버리는 현재 엔비디아의 구매 약정 패턴이 당시 시스코가 붕괴하기 직전의 모습과 판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록적인 75% 마진율, "수요 변화 시 빠르게 무너질 것"
엔비디아의 현재 재무 상태는 표면적으로는 완벽에 가깝다. 2026 회계연도 4분기 기준 엔비디아의 매출총이익률(Gross Margin)은 75.2%에 달한다. 이는 전 분기 대비 1.6%포인트 상승한 수치로, 제조업 기반의 기업으로서는 경이로운 수준의 수익성이다. 버리 또한 엔비디아의 이익률이 과거 시스코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 '압도적인 마진'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버리는 "수요에 미세한 변화라도 생긴다면 이러한 수준의 마진은 순식간에 정상화(하락)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고마진은 강력한 수요와 공급 우위에서 비롯되는데, 과잉 재고가 발생하고 재고 상각이 시작되면 높은 마진율은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결국 엔비디아의 높은 수익성이 오히려 시장 변동성에 대한 내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버리의 핵심 논지다.
호실적에도 급락한 주가, 시장의 불안감 반영했나
이러한 마이클 버리의 경고는 실제 시장의 움직임과 맞물려 투자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있다. 엔비디아는 전날 시장 예상치를 상회하는 호실적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뉴욕증시에서 주가는 하락세를 면치 못했다. 오전 11시 7분 기준 엔비디아 주가는 전장보다 4.75% 급락한 186.2700달러에 거래되었으며, 장중 한때 하락 폭이 5.61%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비즈니스 전문가들은 엔비디아의 이번 주가 하락이 단순한 차익 실현을 넘어, 버리가 지적한 '공급 과잉 리스크'와 '성장 둔화 우려'를 시장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AI 산업의 장기적 전망은 여전히 낙관적이지만, 엔비디아가 감수하고 있는 952억 달러라는 '베팅'의 크기가 과연 감당 가능한 수준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고 있는 시점이다. 15년 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정확히 예측했던 버리의 예언이 이번에도 엔비디아라는 거함의 침몰을 예고하는 것인지 전 세계 금융시장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